李仙玉
2019-01-30 17:01:04 출처:cri
편집:李仙玉

무당산: 도교의 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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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무당산)

개관: 

도교의 명산 무당산(武當山)은 예로부터 “대악무당(大嶽武當)”, “신선복지 (神仙福地)”라 불렀고 도사들이 신선이 되고자 수련하는 곳이었다. 중국에서 많은 도교의 명산 중 무당산 도관(道觀)의 규모가 가장 크다. 

무당산은 도교의 성지이자 쿵후를 뜻하는 무림(武林)의 명산이기도 하다. 무당과 소림(少林)은 중국의 무림에서 쌍벽을 이룬다. 아름다운 경관과 예스러운 고건물의 무당산은 “세상에서 유일한 승경(勝境), 천하에서 하나인 선산(仙山)”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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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멀리서 본 무당산)

역사:

무당(武當)이라는 지명은 최초로 <한서(漢書)>에 기록되어 있다. 한(漢)나라 때인 202년에 무당현이 설립되고 한나라 후반부터 당(唐)나라 까지 무당산은 선학(仙學)을 구하는 도인들의 명소였다. 

당나라 때인 627년부터 649년까지 사이에 당 태종(太宗)이 무당산에서 기우제를 지내기 위해 오룡사(五龍祠)를 축조했고 그로부터 무당산은 역대 황제들의 중시를 받아 높은 위상을 자랑했다. 

명(明)나라 때인 1412년부터 명 성조(成祖)가 무당산에 대 규모 건물을 축조하기 시작해 12년만인 1423년에 크고 작은 전각 33채를 지었으며 1552년부터는 무당산을 지고무상의 황실사당으로 인정해 도관을 대 규모로 증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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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무당산의 일각)

1956년 무당산 고건물은 중국 중점 문화재 보호업체에 선정되고 1994년 무당산 고건물의 군락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명록>에 등재되었다. 

2010년 무당산은 중국에서 수준이 가장 높은 5A급 관광지와 국립 산림공원, 중국 10대 피서의 명산, 가장 아름다운 “국립 지질공원”에 선정되었다. 

소림무술과 함께 중국 쿵후의 쌍벽을 이루는 무당무술은 원나라 후반, 명나라 초반에 도사 장삼풍(張三風)이 여러 가지 무술의 기법을 집대성해서 만든 무당파(武當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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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무당산)

주요명소:

과거에 태화산(太和山)이라 불린 무당산은 웅장한 산세에 산발이 기복을 이룬 신농가(神農架)를 뒤로 하고 앞쪽으로 단강구(丹江口) 댐을 마주한다. 400 여 km 를 뻗은 산발에 72산봉이 있고 정상인 천주봉(天柱峰)은 해발고도가 1612m에 달한다. 

정상의 양쪽에 산봉들이 한 일(一)자로 줄지어 있는데 동쪽의 산봉은 서쪽으로 기울고 서쪽의 산봉은 동쪽을 향해 기울어 72개의 산봉이 정상을 향해 참배하는 듯 하다. 

72산봉과 36바위, 24시냇물, 11동굴, 3 연못, 9 샘물, 9 우물 등 자연 경관을 거느린 무당산에는 또 53채의 고건물이 남아 있고 건축유적지는 9곳에 달하며 지금까지 보존된 여러 가지 문화재는 5,035건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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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무당산 정상의 건물)

“만세(萬世)의 위관(偉觀)’이라 불리는 무당산 도관은 규모가 웅장하고 구도가 절묘하다. 천주봉 남쪽에 위치한 태화궁(太和宮)은 20 여 채의 건물을 거느린 고건물의 군락이다. 

홀로 우뚝 솟은 산봉에 세워진 건물은 산발을 따라 교묘한 구도를 자랑해서 무당산 최고의 비경으로 인정된다. 도사든 관광객이든 태화궁을 보아야만 무당산을 보았다고 인정한다. 

1412년에 명성조가 태화궁의 축조를 명하고 그 후 무당산을 “대악(大嶽) 태화산(太和山)’이라 봉하고 무당산 정상에 축조한 도궁(道宮)도 “대악 태화궁”이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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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무당산의 금전)

천주봉 앞의 소연봉(小蓮峰)에 자리잡은 금전(金殿)은 원(元)나라 때인 1307년에 주조한 구리 건물이다. 높이 3m, 너비 2.8m, 깊이 2.4m의 금전은 맞배지붕을 하고 있으며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구리 건물이다. 

이 황금색의 금전은 천둥이 울고 번개가 치며 큰 비가 내릴 때면 금전의 주변에 벼락이 쳐서 눈부신 불꽃이 튀지만 건물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다. 

명나라 때인 1419년에 축조한 자금성(紫禁城)은 천주봉의 산발을 따라 축조된 둘레 345m, 성의 두께 2.4m, 높이 10m에 달하는 석조 성이다. 500 킬로그람의 큰 돌을 쌓아 축조한 이 성은 깎아 지른 듯한 낭떠러지에 축조되었고 하늘나라의 천문(天門)을 모방해서 동서남북에 네 개의 성루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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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무당산의 운무)

무당산 북쪽 기슭에 조성된 정락궁(淨樂宮)은 무당산 구궁(九宮)의 으뜸이다. 명나라 때 신축했다가 청나라 때 개축한 이 건물은 패방과 궁문, 본전, 욕실, 창고, 곁채 등 다양한 용도의 건물을 거느리고 있으며 주변에 푸른 기와를 얹은 붉은 담이 둘러서 있다. 

무당산에 진입하는 입구에 세워진 현악문(玄嶽門)은 명나라 때인 1552년에 축조한 패방(牌坊)이다. 기둥 4개에 5층으로 된 석조 현악문은 높이가 12m이고 너비가 12.81m에 달한다. 

거대한 돌을 조각해 세운 현악문에는 여러 가지 조각 기법으로 선학과 상서로운 구름, 하늘을 나는 용, 여덟 신선 등 무늬를 새겼다. 치밀한 구도를 자랑하는 조각은 대범함을 보여주고 정교한 기법은 중국의 석각예술의 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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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무당산의 건물)

무당산 북서쪽에 위치한 옥허궁(玉虛宮)은 명나라 때인 1413년에 축조했으며 2,200 여 칸의 방을 거느려 원래 무당산에서 규모가 가장 큰 고건물의 군락이었다. 

현재는 건물의 담벽과 문이 남아 있으며 문안과 문밖에는 비석이 세워진 정자 두 개가 서로 마주 바라본다. 문밖의 두 비석은 명나라 때인 1552년 태화산을 보수할 때의 성지(聖旨)비와 1553년 <태화산 궁전 보수비>이며 문안의 두 비석은 명나라 때인 1413년 무당산 보호를 위해 내린 성지(聖旨)비와 1418년의 태화산 도궁(道宮)비이다. 

비석에는 힘있는 필치의 글자가 새겨지고 비문의 주변에는 용이 조각되어 있으며 비석 하단의 거북도 형상적인 모습을 해서 무당산 석각예술의 대표작으로 인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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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무당산의 건물)

50여 개의 방을 거느린 마침정(磨針井)은 명나라 때에 신축하고 청나라 때인 1852년에 개축했으며 1984년에 보수를 거친 도교의 궁관(宮觀)이다. 

현악문에서 10km 거리에 위치한 이 마침정에는 이런 이야기가 깃들어 있다. 옛날 한 왕태자가 수련하고자 무당산에 이르렀는데 의지가 굳지 못하여 수련여부를 결정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가 이 곳에 이르자 한 할머니가 우물가에 앉아서 쇠로 된 절구공이를 갈고 있었다. 왕태자가 의아해하며 뭘 하냐고 물으니 할머니는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고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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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무당산의 건물)

왕태자가 놀라며 “그건 너무 어렵지 않습니까!’라고 했고 그러자 할머니는 “수련하면 절구공이도 자연스럽게 바늘이 되느니라”라고 했다. 그 말에 왕태자는 크게 깨달음을 얻고 무당산에 들어가 수련에 성공했다고 하며 후세 사람들은 그 자리에 건물을 짓고 마침정이라 이름했다고 한다. 

도인들은 높은 곳에 자리잡은 마침정은 날마다 떠오르는 첫 햇살의 양기(陽氣)를 받는다고 해서 순양궁(純陽宮)이라 부르기도 한다. 아담하고 긴밀한 구도를 자랑하는 마침정에는 쇠절구공이를 갈아서 바늘로 만드는 이야기가 벽화로 그려져 있다. 

마침정의 본전인 조사전(祖師殿)에는 진무대제(眞武大帝)가 무당산에서 수련하던 과정이 생동하게 그려져 있고 전각 앞에는 두 개의 굵은 쇠절구공이가 세워져 있으며 그 옆에 귀퉁이가 건듯 들린 두 겹의 지붕을 한 정자가 세워져 있고 정자 속의 우물가에는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절구공이를 가는 할머니가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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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무당산의 건물)

1412년에 신축하고 1683년에 개축한 복진관(復眞觀)은 60도 각을 이루는 사자봉의 산자락에 축조되어 있다. 뒤에 사자산을 업고 앞에 천지폭포를 마주하며 왼쪽에 꼬불꼬불한 산길이 펼쳐진 복진관은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물속의 부용인 듯 하고 가까이 다가서서 보면 화려한 성을 방불케 한다. 

고대의 건축대가들은 지세를 교묘하게 이용해 산비탈에 크고 작은 건물 200여 칸을 지었으며 “짧은 거리에 문 네 개가 있고”, “아홉 번 굽이를 돈 담벽”과 “한 기둥이 열 두 개의 대들보를 받든” 기이한 경관을 연출한다. 

복진관의 산문에 들어서면 산세를 따라 축조한 71m 길이의 붉은 담벽이 보인다. 교묘한 구도를 자랑하는 이 구곡황하장(九曲黃河墻)은 구불구불 기복을 이루며 웅장함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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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무당산의 담벽)

두께 1.5m, 높이 2.5m의 구곡황하장은 미끈하게 뻗어 있고 녹색의 유리기와를 얹어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두 마리의 용이 산중에서 노니는 듯 하다. 

이문(二門)에 들어서면 아늑하고 넓은 뜰이 나타나고 앞쪽에 오운루(五雲樓)가 있고 가운데 황경당(皇經堂)과 장경각(藏經閣)이 있으며 뒤에 키 높은 태자전(太子殿)이 솟아 있다. 

5층 건물의 오운루는 높이가 15.8m에 달하여 무당산 건물 중 가장 높은 목조건물이다. 오운루에서 가장 유명하고 고대 중국인들의 지혜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기둥 1개가 대들보 12개를 받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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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무당산의 건물)

복진관은 크고 작은 건물들이 엄밀한 구도로 조화로워 교묘하면서도 신비감을 자랑한다. 복진관의 높은 곳에 서서 내려다 보면 계곡으로는 맑은 시냇물이 흐르고 수려한 산봉이 둘러서 있는데 석양이 비추면 더욱 아름답다. 

무당산에서 경치가 가장 아름다운 곳은 원나라 때인 1285년에 신축하고 명나라 때인 1412년에 증축한 남암(南岩)이다. 현재 21채의 건물이 보존되어 있고 본전은 1310년에 지은 천을진경궁석전(天乙眞慶宮石殿)이다. 

건물 너비 11m, 높이 6.8m, 깊이 6.6m의 이 건물은 대들보와 기둥, 문, 창문 등이 모두 청석으로 축조되어 있으며 길이 3m 너비 0.33m의 용의 머리 용두(龍頭)가 낭떠러지 쪽으로 뻗어 있으며 용두 위에 작은 향로가 놓여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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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무당산)

키워드: 

역사문화, 풍경, 종교

위치와 교통: 

무당산은 호북(湖北, Hubei)성 십언(十堰, Shiyan)시에 위치, 다양한 교통편으로 호북 성도 무한(武漢, Wuhan)에 도착한 다음 열차를 이용해 무당산역에서 하차한다. 

혹은 무당산 공항을 이용한다. 무당산 공항에서 무당산 명소까지는 2호선 버스를 이용, 공항에서 무당산까지 40분이 소요된다. 무당산에는 여러 명소들에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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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무당산)

계절: 

봄과 가을

설명: 

중국 도교의 한 파인 무당도교는 충성과 효도, 윤리를 주요 특징으로 하는 도교이다. 기원전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부터 한(漢)나라 후반까지 사이에 무당산은 벌써 많은 사람들이 수련하는 종교의 장소였고 동한(東漢)말년에 도교가 탄생한 후 무당산은 도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수(隨)나라와 당(唐)나라 황제들이 도교를 숭상하면서 무당 도교가 빠른 발전을 가져왔다. 노자(老子) 후예로 자처하는 이씨 당왕조의 지지로 도교는 당나라 때 삼교의 으뜸이 되었다. 

송(宋)나라 지배자들도 도교를 숭상해 도교의 위상이 계속 높아지고 도교의 영향이 날라 확대되었고 원(元)나라 때 무당산은 원나라 황제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도장이 되어 무당의 도교가 비약적인 발전을 가져오게 되었다. 

명(明)나라 때 무당산은 명나라 “황실의 사당”이 되어 무당산의 위상이 오악(五嶽)을 넘어서 “천하 제일 선산(仙山)”이 되었으며 200여 년간 번성일로를 달렸다. 

1522년-1566년 사이에 무당산에는 600 명의 도사(道士)가 있었고 도인은 만 명에 달했으며 무당산을 찾는 사람은 더욱 부지기수였다. 청(淸)나라 때에 이르러 도교보다 불교를 숭상하면서 무당도교가 몰락하기 시작했으나 민간에서는 여전히 많은 신도들이 무당산을 찾아 오늘날까지 이른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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