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仙玉
2019-08-21 12:39:29 출처:cri
편집:李仙玉

大旗頭: 淸나라 때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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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대기두)

개관: 

광동(廣東) 불산(佛山)의 대기두(大旗頭)촌은 명(明)나라 때 벌써 촌락을 이뤘다.  지붕 양쪽에 청색의 벽돌로 냄비 손잡이 모양의 외벽을 높이 쌓은 “과이식(鍋耳式)”건물들이 줄지어 장관이다. 건축물 양식이 특이한 청(淸)나라 때의 대표적인 마을이다. 

멀리서 대기두촌을 바라보면 구조와 모양, 높이가 비슷한 건물들이 정연하게 줄지어 웅장한 기세를 자랑하고 반달모양의 지붕 라인은 또 마을에 부드러움을 가미한다. 

마을의 뒤에는 붓 모양의 탑인 문탑(文塔)이 세워져 있고 탑의 양쪽에는 벼루를 방불케 하는 네모난 큰 바위와 인감을 방불케 하는 작은 모난 바위가 하나씩 놓여져 “문방사우”를 뜻하며 자손들이 공부해서 벼슬길에 오르기를 기원하는 선조들의 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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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대기두의 전경)

역사:

1527년 명(明)나라 때 정(鄭)씨 성의 한 사람이 이 곳에 이르러 터를 잡으면서 다른 성씨의 사람들도 모여 들어 함께 대기두촌을 이루기 시작했다. 

마을의 옆으로 강물이 흐르고 강물 위에 대교(大橋)가 놓여져 있다고 해서 처음에는 대교두(大橋頭)촌이라 불렀다. 그 뒤에 청나라 때에 이르러 마을의 남서쪽 언덕에 정씨 가문의 6대 손이며 광동의 수사제독(水師提督)이라는 벼슬을 지낸 정소충(鄭紹忠)의 묘를 조성했다. 

마을에서 멀리 바라본 정소충의 무덤이 큰 깃발처럼 보인다고 해서 사람들은 마을의 이름을 큰 깃발의 마을이라는 의미로 대기두(大旗頭)촌이라 개명했다. 

1891년 정소충의 모친이 별세하자 정소충은 고향에 돌아와 2년간 있으면서 사택을 축조하기 시작했다. 정소충은 정씨가문의 사당건물을 중심으로 자신의 저택인 상서제(尙書第)를 그 옆에 지었으며 주변에 다른 건물들을 정연하게 배치해 큰 규모의 마을을 조성했다. 

1994년 대기두촌은 광동성 삼수(三水)시의 중점 문화재 보호업체에 선정되고 1997년에 불산(佛山)시 중점 문화재 보호업체에 선정되었으며 2002년에는 광동성 중점 문화재 보호업체에 선정되었다. 

2003대기두촌은 중국 역사 문화의 유명 도시 12곳 중 하나로 선정되었으며 2004년 광동성 문화청에 의해 광동의 첫 마을로 선정되었고 지방정부가 고대 마을의 보호와 수선을 확대하면서 고대 마을이 새로운 명소로 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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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대기두촌의 건물)

주요명소:

대기두촌은 청나라 때 광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과학적이고 엄밀한 “빗 모양의 구도”를 형성한다. 대기두촌에서는 이런 구도의 과학성을 잘 볼 수 있다. 

마을은 전체가 앞쪽에 낮고 뒤로 가면서 점점 지세가 높아져 배수에 유리하며 집집에 딸린 마당도 배수가 원활하게 잘 되도록 비스듬하게 조성되어 있다. 

건물과 건물 사이에는 푸른 돌을 깐 좁은 돌길이 펼쳐져 있고 돌길의 지하에는 수로를 파서 마을의 생활오수가 지세를 따라 마을 앞쪽의 연못에 흘러 들었다가 다시 강물에 배수된다. 

촌민에 의하면 백 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대기두촌은 지금까지 한 번도 물에 잠겨본 적이 없으며 장마철이나 호우가 쏟아져도 침수현상이 나타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또 돌길의 한 쪽은 막혀 있고 다른 한 쪽에는 문루(門樓)가 축조되어 비적이 침입할 경우 문루의 철문을 닫으면 마을은 방어기능이 뛰어난 큰 건물의 군락을 형성하군 한다. 

대기두촌은 광동 주민들의 복잡한 가족사를 구현하는 기나긴 “분가”의 과정을 잘 보여준다. 광동에서는 한 가구가 분가하면 그 가구가 건물을 짓고 건물이 있으면 또 사당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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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대기두촌의 골목)

그런 분가과정이 중복되면서 정연하고 획일적이며 밀집된 건물의 마을 대기두촌이 조성되게 된 것이다. 대기두촌에서는 어느 집에 들어서든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밀어낸다. 

모든 건물들이 소박하고 실용적이며 건물의 구도도 대체로 비슷하다. 마당의 동쪽에 방 세 개가 있으며 남쪽과 북쪽에는 주방과 복도가 조성되어 있다. 

건물의 옆에 난 작은 문을 통해 골목에 나오면 멀지 않은 곳의 바닥에 동전만한 구멍이 보인다. “금전안(金錢眼)”이라는 이름의 그 구멍은 부를 뜻하는 동시에 배수구의 일환이기도 해서 장마철이면 빗물이 그 구멍을 통해 돌길 지하의 배수구에 흘러 든다. 

대기두촌은 배수기능만 강한 것이 아니다. 맞배 지붕의 양쪽에는 돌로 관모(官帽) 모양의 키 높은 외벽을 두텁게 쌓아 방화기능을 가지기도 한다. 광동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이런 외벽은 처음에는 벼슬길에 오른 사람들만 사용했으나 후에 모든 민가들에 사용되며 출세의 소망을 보여준다. 

대기두촌은 방화기능은 물론이고 방어기능도 뛰어난다. 건물마다 외부인의 출입이 어렵게 지어져 있고 마을에 조성된 네 갈래의 곧은 골목 양쪽의 입구에 철문이 준비되어 필요 시 동시에 철문이 내려지면 마을 전체가 든든한 보루가 된다. 

그리고 마을의 골목은 서로 원활하게 통하고 건물과 건물도 육교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마을 사람이 길을 안내하지 않으면 외부인은 미궁에 들어선 듯 출구를 찾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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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대기두촌의 연못)

대기두촌의 외벽은 더욱 감탄을 자아낸다. 두께가 0.5m의 외벽은 겉에 청색의 벽돌을 쌓았으나 내부에는 30cm 두께의 돌이 있어서 화재가 발생해도 불이 이웃에까지 번지지 않으며 화재가 발생한 건물도 구조가 불에 타지 않아 쉽게 보수가 가능하다. 

마을의 환경도 독특하게 조성되었다. 대기두촌에 다가서면 줄지은 건물들이 마을 앞 연못에 거꾸로 비껴 아름답다. 마을 앞쪽에 조성된 이 연못은 붓의 먹을 씻는 물을 상징한다고 한다. 

전한데 의하면 정소충은 자손들이 공부를 잘 해서 출세하기를 소망해 마을 앞에 붓의 먹을 씻은 연못을 조성했고 붓을 상징하는 문탑(文塔)을 조성했으며 탑의 하단에는 벼루와 종이를 상징하는 공터와 잔디를 조성했다. 

문탑 옆에 심은 목면(木棉)나무는 과거 중국의 민간에서 공부를 해서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올라 출세함을 의미했다. 대기두촌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소망을 그렇게 은유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대기두촌의 동구밖에는 또 오래된 용나무가 자라는데 나뭇가지가 무성해 이 곳은 촌민들이 삼삼오오 모여 휴식의 한 때를 보내는 장소이며 이 곳은 대기두촌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진촬영의 명소이기도 하다. 

마을의 노인들이 용나무 밑에 모여 장기를 두고 일부는 탑에 기대어 신문을 읽으며 길의 가운데서는 강아지가 잠을 자고 연못에서는 물소가 더위를 식히는 그림이 대기두촌의 가장 대표적인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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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대기두촌)

키워드: 

민가

위치와 교통: 

대기두촌은 광동(廣東, Guangdong)성 불산(佛山, Foshan)시 삼수(三水, Sanshui)구 락평(樂平, Leping)진, 광주(廣州, Guangzhou)시와 가까운 곳에 위치, 광주에서 차량을 임대해서 이동한다. 

혹은 다양한 교통편으로 불산에 이른 다음 불산에서 삼수행 버스를 이용하고 삼수에서 613호선 버스나 661호선 버스를 이용, 대기두촌에서 하차한다. 

계절: 

1년 4계절

설명: 

대기두촌을 본 다음 대기두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대기두촌과 비슷한 고대의 마을 장기고촌(長岐古村)을 보면 광동의 고대 마을을 더 전반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장기고촌도 명나라 때 조성을 시작했으며 현재의 건물은 다수가 청나라 초반의 건물이다. 앞에 강물을 마주하고 뒤에 문필산(文畢山)을 업은 장기고촌은 좋은 생태계를 유지한다. 

이 마을의 건물들은 마당의 사면에 건물들이 줄지어 있는 사합원(四合院)구도이며 석각과 벽돌조각, 벽화 등 많은 문화재가 건물들 사이에 산재해 있다. 

1980년대 마을 사람들이 주변에 새로 조성한 마을에 이주하고 기존의 마을에 남아 생활하는 촌민들이 극히 소수가 되면서 이 고대 마을은 기존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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