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仙玉
2019-04-12 17:44:12 출처:cri
편집:李仙玉

주선진: 세화의 고장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41070700173462140

(사진설명: 아름다운 주선진)

개관: 

목판 세화의 고장 주선진(朱仙鎭)은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 광동(廣東)의 불산(佛山), 강서(江西)의 경덕(景德), 호북(湖北)의 한구(漢口)와 함께 중국의 4대 유명한 도시였다. 

1300 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주선진 목판 세화는 아름다움과 낭만주의 색채, 밝은 분위기로 강한 호소력을 자랑하며 중국 목판 세화의 비조로 인정되고 이로써 주선진은 명나라와 청나라 때 중국에서 4대 목판 세화 기지가 되었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41070700173462052

(사진설명: 주선진의 일각)

역사:

5,6천 년 전의 신석기 시대에 주선진에는 인류가 살았고 기원전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에 주선진은 정(鄭)나라에 속했다. 기원전 258년 위(魏)나라 출신인 주해(朱亥)가 신릉군(信陵君)과 함께 조(趙)나라를 구해 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주선진은 주해(朱亥)의 고향이고 주해가 선인장(仙人庄)에 살았다고 해서 지명이 주선진이다. 백정이었던 주해는 진(秦)나라를 격퇴하고 조(趙)나라를 구하며 위(魏)나라를 지키는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1351년 원(元)나라 순제(順帝)가 황하의 물길을 끌어 들여 주선진을 거쳐 운하(運河)에 흘러 들게 했고 그 물길이 바로 주선진을 경유하는 가로하(賈魯河)강이며 그로 인해 수운이 발전한 주선진은 개봉의 유일한 부두가 되었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41070700173462115

(사진설명: 주선진의 물길)

명나라와 청나라 때 주선진은 최고의 번성일로를 달려 매일 주선진의 부두를 오가는 선박은 200 여 척, 도시에 상주하는 주민은 30 여 만 명, 절만 해도 110 여 곳에 달했다. 

1900년 황하강과 운하를 연결하는 물길이 막히고 철도가 개통하면서 주선진의 수운 우위가 부재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주선진도 점점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1948년 해방을 맞은 후 주선진은 고건물과 문화유적을 복원하고 기존의 목판 세화 우위를 계승하고 발전시키면서 아름다운 경치와 유구한 역사, 풍부한 문화를 가진 관광지로 부상했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16954020701121280

(사진설명: 주선진의 목판 세화)

주요명소:

최고의 번성을 자랑하던 명나라 후반 청나라 초반에 주선진은 면적이 25제곱킬로미터에 달하고 인구는 20만명이 넘었며 상가는 4만에 달했고 도시의 얼기설기한 거리와 골목에서는 온갖 상품이 눈을 어지럽혔다. 

가로하(賈魯河) 강이 주선진을 동진(東鎭)과 서진(西鎭)으로 나누었고 초기에는 동진이 더욱 번화했다. 그러다가 청나라 건륭(乾隆)제 후에 황하(黃河)강이 범람하면서 지세가 낮은 동진이 홍수의 피해를 자주 입어 상가들이 서서히 서진으로 자리를 옮겼다. 

1400 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계봉고성(啓封故城)은 현재 성터와 기둥 자리만 남았지만 고도(古都) 개봉(開封)의 전신으로 개봉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16956683564086766

(사진설명: 주선진의 유적지)

가로하강에 놓인 대석교(大石橋)는 명나라 때 축조되었으며 석교의 모양이 우아하고 구도가 엄밀하며 기법이 아주 정교하다. 이 석교는 주선진의 역사를 말없이 지켜온 증인이라 할 수 있다. 

악비(岳飛) 점장대(点將臺)는 높이가 4m, 최장의 지름이 3m, 둘레 12m의 나지막한 타원형 흙더미이다. 전한데 의하면 이 곳은 악비가 주선진에서 금(金)나라 군과 싸울 때 군사를 지휘하던 곳이라고 한다. 

북송 때의 애국장군 악비(岳飛)를 기리기 위해 세운 주선진의 악비묘(岳飛廟)는 중국에서 4대 악비묘의 하나이며 현재 주선진의 목판 세화사가 바로 이 곳에 위치해 있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16956683564086857

(사진설명: 주선진의 악비묘)

악비묘는 명나라 때인 1478년에 신축하고 1509부터 청나라 때인 1660년까지 사이에 수차에 걸쳐 보수와 증축을 통해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고건물의 군락을 형성했다. 

악비묘는 비림(碑林)인 동원(東院)과 악비묘의 본전이 위치한 서원(西院)으로 분류된다. 세 겹의 뜰을 가진 서원에는 산문(山門)과 배전(拜殿), 대전(大殿), 침전(寢殿)이 중심선에 줄지어 있으며 양쪽에 곁채와 오자사(五子祠)와 오장사(五將祠) 등 건물들을 거느린다. 

산문을 넘어 서면 곧게 뻗은 통로가 배전까지 닿아 있고 배전을 지나면 청색의 벽돌로 외벽을 쌓고 대들보와 기둥에 조각과 그림이 즐비하며 귀퉁이가 건듯 들린 지붕에 녹색의 유리기와를 얹은 대전이 나타난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16956683564086814

(사진설명: 악비묘의 건물)

건물에는 “대명(大明) 천계(天啓) 2년(二年)”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이 건물이 1622년에 지어졌음을 증명한다. 대전의 앞 양쪽에는 악비 친필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대전의 뒤에는 악비의 침전이 위치하고 침전의 양쪽에는 오장사와 오자사가 대칭을 이룬다. 동원의 비림에는 300 여 기의 비석이  모여 서예와 조각의 하모니를 보여준다. 

주선진의 이슬람 사원 청진사(淸眞寺)는 북송 때에 신축하고 명나라 때인 1531년에 증축하고 청나라 때인 1744년에 개축해 천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41122995695257436

(사진설명: 주선진의 일각)

중국의 많은 다른 이슬람사원과 비교하면 주선진의 이슬람사원은 건축양식과 장식이 모두 보기 드문 고유의 특징을 자랑한다. 전한데 의하면 악비 장군이 금나라 군과 싸울 때 이 사원에 원수부(元帥府)를 두었다고 한다. 

그 때 악비는 늘 사원 마당의 회화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혔고 그 회화나무가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명나라 때의 아랍어로 된 비석도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이 비석에는 당시 주선진의 무슬림들이 알라신을 참배하던 성황이 기록되어 있으며 이 아랍어 비문의 비석은 하남에서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문화재이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16968365891907864

(사진설명: 주선진의 세화)

주선진의 세화는 당나라 때 시작되어 송나라 때 흥성일로를 달려 명 나라와 청나라 때 최고를 이루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주선진의 세화는 중국의 4대 목판 세화의 하나이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주선진에는 300 여 개의 목판 세화 작업실이 있었고 주선진에서 창작된 목판 세화는 중국 각 지역에 진출했다. 개봉 일대의 세화는 모두 “주선진 목판 세화”라는 브랜드로 큰 영향력을 가졌다. 

주선진의 목판 세화는 아주 높은 예술적 소장가치를 가지는 동시에 감상가치도 아주 높다. 중국의 많은 명인들이 주선진의 목판 세화를 소장했고 노신(魯迅)선생도 높은 평가를 했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16896657101039733

(사진설명: 주선진 세화 박물관)

2006년에 중국 무형문화재에 등록된 주선진 목판 세화는 색채가 산뜻하면서도 장중해 보이고 식물염료를 사용해 영원히 탈색하지 않는 특징을 가진다. 

짙은 시골분위기와 강한 민속적 정취, 독특한 예술 풍격과 색채, 예술적 매력을 자랑하는 주선진 목판 세화는 중국의 “영원한 보배”, “중국의 국보”로 인정된다. 

2011년 주선진 목판세화 박물관이 개관되었다. 북방 민가 특색을 자랑하는 사합원(四合院) 형식으로 된 세화 박물관에서는 세화의 역사와 지역별 세화를 잘 볼 수 있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16989574448691684

(사진설명: 주선진 세화의 목판)

키워드: 

역사인문, 고건물, 민속

위치와 교통: 

주선진은 하남(河南, Henan)성 개봉(開封, Kaifeng)시에서 남쪽으로 22km 거리에 위치, 다양한 교통편으로 개봉에 도착한 다음 상국사(相國寺)에서 주선진행 버스를 이용한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48498743034249505

(사진설명: 주선진의 세화)

계절: 

1년 4계절

설명: 

주선진의 목판 세화는 구도가 포만하고 무늬가 심플하며 조형이 과장되고 색채가 산뜻한 특징을 자랑한다. 특히 머리와 몸의 비례를 과장적으로 묘사해서 강한 호소력을 자랑한다. 

주선진의 목판 세화에 나오는 인물은 준수하면서 요염하지 않은 것을 주된 특징으로 한다. 구도적으로 주선진의 세화는 화면에 거의 여백이 없으나 화면이 복잡하지 않고 주제가 선명하며 무늬가 대칭을 이룬다. 

주선진 세화는 굵고 가는 무늬가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북방 민족의 순박함과 넉넉함, 튼튼함을 잘 보여준다. 주선진 세화는 노란 색과 붉은 색, 청색을 주로 사용해 산뜻하고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한다. 

주선진 목판 세화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인물은 다양한 문신(門神)이며 그 밖에 게임용으로 사용되는 세화도 있고 결혼식 때 사용하는 길함을 보여주는 세화와 제사에 사용되는 세화 등 많은 종류의 세화가 있다. 

图片默认标题_fororder_416914996611460763

(사진설명: 악비의 동상)

1103년-1142년의 악비는 남송(南宋) 때 금(金)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운 유명 장군이고 군사가, 전략가, 민족영웅, 서예가, 시인이다. 20살부터 군인이 된 악비는 1128년부터 1141년까지 사이에 수 백 차에 달하는 크고 작은 전투에 참가했다. 

악비는 강남까지 진군한 금나라 군과 싸워 금나라 군에 빼앗긴 땅을 되찾으며 북상해 주선진에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송나라 고종(高宗)제가 금나라와의 화의를 꾀했고 악비는 재상인 진회(秦檜)에게서 억울한 죽임을 당한다. 

송 효종(孝宗)제 때 악비는 억울한 누명을 벗고 항주(杭州) 서호(西湖) 기슭의 서하령(栖霞嶺)에 묻혔으며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고 악왕(鄂王)으로 봉 받았다. 

엄격한 규율을 지키면서도 부하를 잘 생각해주는 악비와 그의 군대는 “얼어 죽더라도 집을 허물지 않고 굶어 죽더라도 약탈을 하지 않아” 적수인 금나라 군도 “산을 움직이기는 쉬워도 악가군(岳家軍, 악비의 군대)를 움직이기는 힘들다”고 악비를 높이 평가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공유하기:

댓글달기()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