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仙玉
2019-02-19 12:32:04 출처:cri
편집:李仙玉

추성: 맹자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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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추성)

개관: 

유가의 대표적인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맹자(孟子)의 고향 추성(邹城)에는 맹자의 사당인 맹묘(孟廟)와 맹자 가문의 저택인 맹부(孟府), 맹자가문의 선산인 맹림(孟林)이 있다. 

추성의 수려한 산수 속에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풍부한 문화재가 300여 곳의 명소를 형성하고 그 중 맹묘와 맹부, 맹림, 맹모림(孟母林)을 말하는 “사맹(四孟)”과 철산(鐵山)과 강산(崗山), 갈산(葛山), 첨산(尖山)을 말하는 “사산(四山)”이 가장 유명하다. 

“아성묘(亞聖廟)”라 불리는 맹묘는 1037년에 건설을 시작했고 그 뒤에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때에 개축과 증축을 거쳐 원나라 때부터 청나라 때까지의 고건물이 많이 집중된 오늘날의 규모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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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맹묘)

역사:

서주(西周, BC 1046~BC 771 ) 초기에 추성은 주국(邾國)이라 불렀고 (魯)나라에 속했다. 기원전 614년에 주(邾)를 추(邹)로 개명했으며 진나라 때인 기원전 221년 추현을 설립, 그때로부터 역대의 왕조를 거쳐 오늘날의 추성에 이른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맹묘는 북송(北宋) 때인 1037년에 물가에 신축했고 홍수가 자주 져서 1121년에 현재의 장소로 옮겨지었으며 금(金)나라와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때 38회에 걸쳐 개축과 증축, 보수를 했다. 

맹자의 저택인 맹부(孟府)는 맹묘와 함께 북송 때인 1037년에 지은 것으로 추측되며 1121년에 맹묘를 옮겨 지으면서 맹부도 함께 맹묘의 서쪽에 옮겨 지었다. 

일찍 동한 때 맹자는 “아성(亞聖)의 대재(大才)”라고 불렸고 아성을 공식 칭호로 사용하기 시작된 때는 원나라 때부터이다. 원나라 때인 1330년에 맹자가 “추국(邹國)아성공(亞聖公)”이라는 명칭을 받으면서 아성공은 맹자의 대명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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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추성)

주요명소:

추성의 사산(四山)에는 모두  남북조(南北朝)시기인 420년-589년 사이의 작품으로 중국 서예예술의 대표작으로 불리는 마애석각이 많다. 산 위에는 절과 도관, 정자와 누각이 세워져 있고 산을 오르는 길의 양쪽에는 기암괴석과 동굴이 즐비하다. 

산봉의 해발이 555m이고 둘레가 10km에 달하는 사산에는 기이한 산봉과 바위, 아찔한 낭떠러지와 벼랑, 아늑한 계곡과 동굴, 푸른 소나무와 맑은 물이 비경을 이룬다. 

그 중 철산(鐵山) 마애석각은 길이 66m, 너비 16m의 45도각으로 비스듬한 바위에 새겨져 있다. 바위의 상단에는 거대한 용과 구름, 불광 등의 무늬가 새겨져 있고 불광의 하단에는 불교의 경전들인 <대집경(大集經)>과 <송문(頌文)>, <제명(題名)>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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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추성의 마애석각)

<대집경>은 17줄에 도합 940자의 한자가 새겨져 있으나 오랜 세월 동안 795자만 글자의 모양이 보인다. 경전은 주로 예서체로 썼고 가끔 해서체와 초서체도 섞어 썼다. 

<송문>은 원래 2 줄에 614자를 새겼으나 현재는 437자 밖에 남지 않았고 철산 마애석각의 위치와 환경, 마애석각을 새기게 된 경과를 기록하고 마애석각 서예의 기법을 높이 평가했다. 

그 밖에 추성에서는 24곳에 분포되어 있는 강산(崗山) 마애석각과 길이 20m, 너비 8m의 바위에 580년에 새긴 갈산(葛山) 마애석각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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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맹묘)

남북 길이 458.5m, 동서 너비 95m의 맹묘는 공묘 버금으로 산동에서 역사가 가장 오래되고 가장 완전하게 보존된 고건물의 군락이다. 다섯 겹의 뜰에 크고 작은 전각 64채를 거느린 맹묘는 아성전을 주요 전각으로 하며 중심선 양쪽에 건물들이 대칭을 이룬다. 

남쪽에 3개의 큰 뜰이 있고 북쪽 부분은 좌로(左路)와 중로(中路), 우로(右路) 등 세 갈래로 분류되어 있다. 맹묘의 정문인 영성문(棂星門)은 청나라 때인 1662년부터 1722년 사이 맹묘를 개축하면서 신축했다. 

4개의 기둥에 받들려 있는 목조건물인 영성문은 기둥과 대들보에 화려한 색채의 조각과 그림이 즐비하고 귀퉁이가 건듯 들린 지붕은 금방이라도 날아갈 듯 웅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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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묘의 문)

과거에 영성문은 해마다 음력으로 2월과 8월 맹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혹은 황제나 오거나 황제가 파견한 대신이 올 때만 열고 평소에는 열지 않아 장엄함을 더 해준다. 

영성문을 넘어 서면 유교학설을 계승하고 고양한 맹자를 표창하기 위해 동쪽과 서쪽 양쪽에 대칭되게 세운 계왕성(繼往聖)과 개래학(開來學) 두 패방(牌坊)이 있다. 

영성문 뒤에 펼쳐진 첫 번째 뜰을 지나 북쪽으로 가면 정교한 조각이 즐비한 석조 패방 아성방(亞聖坊)이 맞이해준다. 맹묘의 두 번째 문인 아성방은 팔각형의 돌 기둥 4개에 받들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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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묘의 패방)

아성방의 동쪽에는 명 나라 때인 1581년에 세운 <추아성공묘(邹亞聖公廟)> 비석 1기가 있다. 비문에 의하면 이 패방은 명나라 때 맹묘의 정문이었음을 읽을 수 있다. 

아성방을 지나면 펼쳐지는 맹묘의 두 번째 뜰에는 고목이 하늘을 가리고 울창함을 자랑하며 그 사이로 난 통로가 웅장한 문루(門樓)인 의문(儀門)까지 뻗어져 있다. 

의문을 지나면 맹묘의 세 번째 뜰이 펼쳐지고 뜰을 지나면 세 개의 문이 나란히 맞이해주고 그 문을 지나면 맹묘의 본전인 아성전이 솟아 있는 맹묘의 네 번째 뜰이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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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묘의 아성전)

1121년에 신축한 아성전(亞聖殿)은 맹자에게 제사를 지내는 맹묘의 본전이다. 아성전은 높이가 17m, 너비가 28m, 깊이가 21m에 달하며 이중으로 된 지붕에 녹색의 유리기와를 얹은 궁전 건물이다. 

다양하고 정교한 조각이 즐비한 26개의 팔각형 돌 기둥이 건물을 받들고 있으며 전각의 처마 위에는 청나라 건륭(乾隆)제의 어필로 된 금박을 칠한 해서체의 “아성전”이라는 액자가 웅장하다. 

아성전의 중앙에는 맹자의 조각상이 공양되어 전각에 들어서면 숙연한 느낌이 든다. 맹자를 기념하는 아성전은 고건물과 조각, 주조, 회화를 한 몸에 모은 예술의 박물관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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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묘의 침전)

높게 축조된 통로로 아성전과 연결된 침전(寢殿)은 원래 맹자 부모의 사당이었다. 원나라 때인 1295년에 신축한 침전은 명 나라 때인 1497년에 맹묘를 개축하면서 침전으로 개명하고 맹자 부인의 사당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침전이 맹자 부인의 사당으로 사용되면서 맹자 부친의 사당은 계성전(啓聖殿)으로 옮기고 맹자 모친의 사당은 높이 축조된 통로로 계성전과 연결된 맹모전(孟母殿)으로 옮겨졌다. 

아성전의 서쪽에 작은 뜰이 하나 있고 뜰의 네 벽에 50여 기의 비석이 세워져 운치를 돋우며 아성전의 동쪽 뜰에는 두 그루의 오래된 은행나무가 자등나무와 어울려 해마다 초여름이 되면 향기로운 자등나무 꽃이 피어 맹묘를 이채롭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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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묘의 고목)

맹묘에서는 고목도 한 명물이다. 맹묘에는 여러 종의 수목 430여 그루가 자라며 푸른 소나무들 사이로 회화나무와 은행나무, 자등나무가 어울려 조화의 극치를 이룬다. 

1년 4시절 푸르른 맹묘의 고목들은 굵은 가지의 나무가 다양한 모양도 자랑해서 멀리서 고목을 바라보면 혹은 짐승 같기도 하고 봉황 같기도 해서 천태만상을 이룬다. 

맹묘의 고목들 속에서는 송나라 때 맹묘를 신축할 때 심어 900년의 수령을 자랑하는 향나무가 눈길을 끈다. 맹묘 침전 주변에 자리를 잡은 이 세 그루의 향나무는 맹묘에서 수령이 가장 오래 된 고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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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묘의 은행나무)

이 고목들은 오늘날도 무성하고 울창한데 세 그루의 향나무 중 한 그루에 있는 새집에서 구기자 몇 그루가 자라나 여름과 가을이 되면 푸른 잎에 둘러 싸인 붉은 구기자가 이채를 돋운다. 

지언문(知言門) 근처에도 45그루의 향나무가 자라서 심히 장관이며 그 중에서도 향나무와 회화나무가 어울려 자라는 700년 수령의 “부부나무”가 가장 유명하다. 

침전 서쪽의 벽에 지름이 6m이상이 되는 회화나무가 있는데 현재 줄기는 말랐으나 가지에서 새로운 줄기가 자라 무성하다. 말라버린 줄기에 지름 1m의 둥근 구멍이 생겨 달밤이면 그 구멍으로 보는 달이 또 유난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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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맹부)

아성공부(亞聖公府)라고도 하는 맹부(孟府)는 맹자의 직계자손들이 생활하는 저택이다. 맹묘와 거리 하나를 사이 둔 맹부는 1331년 맹자가 아성공으로 봉받으면서 아성공부라 부른다. 

중국에서 웅장한 규모를 자랑하고 잘 보전된 고건물이며 관아와 저택이 하나로 어우러진 장원인 맹부는 처음에는 규모가 작았으나 역대에 걸친 보수와 증축을 통해 청나라 때에 7겹의 뜰을 거느린 규모로 확대되었다. 

세 개의 뜰로 구성된 앞 쪽은 맹씨의 세습 한림원(翰林院)이 사무를 보는 관아(官衙)이고 가운데는 저택이며 뒤에 가든이 조성되어 있다. 남북 길이 226m, 동서 너비 99m의 맹부에는 다양한 건물 146채가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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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부의 문)

검은 칠을 한 맹부의 문에는 2m 높이의 채색 문신이 그려져 눈길을 끈다. 문의 남쪽에는 키 높은 가림벽이 세워지고 문의 양쪽에는 정교한 돌 사자가 자리를 지킨다. 

정문을 지나 차례로 이문(二門)과 의문(儀門)을 지나면 키 높은 향나무와 푸른 대나무가 자라는 뜰 맞은 쪽에 맹부의 본전인 대당(大堂)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다. 

한림원을 세습하는 맹자의 자손들이 황제의 어지를 받고 관원을 맞이하며 사무를 보는 장소인 대당은 건물이 웅장하고 대당의 동쪽과 서쪽에는 맹부의 온갖 업무를 처리하는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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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부의 건물)

대당의 동쪽에 위치한 오대사(五代祠)는 맹씨가문의 사당이고 대당의 서쪽에 위치한 견산당(見山堂)은 맹자의 자손이 손님을 위해 잔치를 차리던 곳이다. 

대당을 지나면 내택문(內宅門)을 경계선으로 맹부의 저택이 펼쳐진다. 벼슬과 번창, 장수를 뜻하는 길한 무늬들이 새겨진 내택문의 앞과 저택의 주변에는 저택을 순찰하는 사람들이 오가는 통로도 조성되어 있다. 

내택의 첫 뜰은 맹자의 직계들인 한림원 박사들이 생활하는 상방원(上房院)이고 뜰에는 조각과 그림이 즐비한 대들보와 기둥의 고건물 “세은당(世恩堂)”이 솟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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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부의 뜰)

세은당에는 침대와 테이블 등 가구가 진열되어 있고 벽에는 역대 명인들의 서예작품과 그림들이 걸려 있으며 건물 앞의 꽃나무가 봄이 되면 하얀 꽃을 피워 여름까지 향기를 풍긴다. 

세은당 뒤에 자리 잡은 사서루(賜書樓)는 황제의 어지와 황제가 하사한 책 등 서류, 맹씨가문의 기록문서를 보관하는 장소이다. 사서루는 2층으로 된 명나라 때의 건물로 소박하면서도 우아하다. 

전학(前學)과 후학(後學)은 청나라 때 맹자의 제70대 자손이 차린 맹자 자손들의 학교이며 맹부의 가장 뒤에는 온갖 꽃나무들이 즐비한 가든 화원(花園)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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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맹림)

맹림(孟林)은 맹자와 그의 자손들이 묻힌 묘지이다. 북송 때인 1037년에 이 곳에서 맹자의 무덤을 발견한 후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으며 1084년 국비로 묘지 조성을 시작했고 송나라와 원나라, 명나라, 청나라 때에 수차 증축해 오늘날의 규모에 이른다. 

아성림(亞聖林)이라고도 하는 맹림에는 잣나무와 향나무, 단풍나무, 회화나무, 조롱나무, 느릅나무, 가래나무 등 온갖 수종의 고목이 아늑하고 울창한 숲을 이룬다. 

맹림에 들어서면 1.5km 길이의 신도(神道)가 있고 신도의 양쪽에는 키 높은 나무들이 들어서 있다. 신도의 중간 시냇물 위의 석교를 건너 돌을 깐 통로를 따라 명나라 건축풍격을 띤 청나라 때의 건물 형전(亨殿)에 이르게 된다. 맹림의 여기저기에 산재해 있던 귀중한 비석들이 현재 이 형전에 집중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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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추성)

키워드: 

고건물, 역사인문

위치와 교통: 

추성은 산동(山東, Shandong)성 곡부(曲阜, Qufu)시에서 남쪽으로 22km 거리에 위치, 베이징-상해(上海) 철도를 이용해 추성역에서 하차한다. 혹은 다양한 교통편으로 곡부에 이른 다음 다시 추성으로 이동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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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부의 봄)

계절: 

1년 4계절이 다 좋으나 그 중 3-11월이 성수기임.

설명: 

맹자도 공자와 같이 유명한 고대중국의 학자지만 중국의 민간에서는 맹자의 모친에 연관되는 많은 스토리들이 전해지며 맹자의 모친을 위대한 어머니로 인정한다. 

그 중 가장 유명한 스토리가 아들의 학업을 위해 맹자의 모친이 집을 세 번이나 옮긴 “맹모삼천(孟母三遷)”이다. 처음에 맹자는 추성의 북쪽 마안산(馬鞍山) 기슭에 살았는데 근처에 무덤이 있어서 가끔 장례식을 볼 수 있었다. 

그런 과정을 보아온 마을의 꼬마들은 삼삼오오 장례식을 흉내 내며 놀았고 그것을 본 맹자의 모친은 맹자에게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고자 오래 살던 고장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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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모림의 일각)

그렇게 두 번째로 옮긴 곳은 추성 서쪽의 마을이다. 그런데 이 곳에는 근처의 촌민들이 모여 물건을 거래하는 시장이 있어서 맹자와 이 곳의 꼬마들은 싸구려를 부르며 물건을 팔고 사는 놀이를 했다. 

그것을 본 맹자의 모친은 이 곳도 아니다 싶어서 이번에는 선비들이 모여 사는 추성의 남쪽으로 집을 이사했다. 그 곳에는 언행이 우아하고 예의범절에 뛰어난 선비들이 많았다. 

그런 분위기를 본 맹자의 모친은 “이 곳이야말로 아이들이 자라기에 가장 좋은 환경이구나!”하고 감탄하고는 맹자를 서당에 보내 글을 읽게 했으며 그로부터 “맹모삼천”의 미담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추성에서 맹자의 모친을 보는 명소로는 맹자의 부모와 맹자의 일부 자손들이 묻힌 묘지 맹모림(孟母林)을 꼽는다. 돌담에 둘러 싸인 맹모림에는 1만 3천 여 그루의 고목이 자라고 비석들이 있으며 맹자 부모의 위패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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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맹림의 일각)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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