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仙玉
2020-03-30 15:18:34 출처:cri
편집:李仙玉

대소동천: 산과 바다의 명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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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대소동천)

개관:

산과 바다의 명소 대소동천(大小洞天)은 아름다운 바다와 아름다운 산, 아름다운 바위를 가지고 있으며 예로부터 많은 명인들이 이 곳에 많은 명승고적을 남겼다.

아름답고 넓은 해변과 푸른 바다, 숲이 무성한 산, 기이한 바위, 아늑한 동굴이 어우러진 대소동천은 산과 바다로 그린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한폭의 산수화를 방불케 한다.

8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소동천에는 불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사찰과 과거 명인들이 남긴 많은 문화유적들이 산재해 아름다운 자연과 풍부한 인문의 조화를 이룬다.

역사:

748 년 전 감진대사(鑑眞大師)가 일본에서 온 스님과 자신의 제자 15명을 데리고 다섯 번째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삼아까지 흘러와 이 곳에서 1년 동안 묵었다고 전해진다.

감진대사는 남산(南山)에 남산사(南山寺)를 짓고 남산 기슭의 대소동천에 대운사(大雲寺)를 지어 불교를 전파했고 수남촌(水南村)을 불교와 유교(儒敎)문화가 어우러진 문화의 마을로 만들었다.

송(宋)나라 후반의 여성 직포의 대가 황도파(黃道婆, 1245년-1330년)가 해남에 이르러 수남촌(水南村)에서 40년간 살면서 직포기술을 전파해 현지인들의 추앙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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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대소동천)

주요명소:

800 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대소동천은 아름다운 바다와 아름다운 산, 아름다운 바위가 어우러져 빼어난 비경을 자랑하는 삼아 제일의 산수명소이다.

반달 모양의 해변에는 푸른 바다가 펼쳐지고 해안에는 기암괴석들이 즐비하며 산에는 푸른 숲이 울창하고 그 사이에는 아늑한 동굴이 산재해 산과 바다가 웅장한 산수화를 그린 듯 하다.

역대 많은 명인들이 아름다운 경치에 매료되어 이 곳을 찾아 오늘날까지도 보존된 “소동천(小洞天)”과 “해산기관(海山奇觀)”, “선인족(仙人足)”, “시검봉(試劍峰)” 등 마애석각을 남겼다.

선옹수석(仙翁壽石)은 목숨 “수(壽)”자가 새겨진 높이 2.15m의 마애석각이다. 이 글자는 북송(北宋) 때의 유명한 도사(道士)가 쓴 글로 사람 인(人)과 목숨 수(壽), 해 년(年), 풍년 풍(豊) 네 글자로 구성되어 있다.

해산기관 마애석각은 1247년에 현지의 군수가 이 곳을 여행하다가 건물같기도 하고 선박같기도 한 큰 바위를 발견했고 그 바위에 올라서면 아름다운 산과 바다가 한 눈에 보인다고 해서 해산기관(海山寄觀)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대소동천은 전설 속의 동해(東海) 세 선인의 섬인 봉래(蓬萊)와 영주(瀛州), 방장(方丈)과 비견한다고 해서 남해 선인의 산이라 불리며 한때 도사들이 선약을 구하고자 이 곳을 많이 찾았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송나라 때의 유명한 도사 남종오조(南宗五祖)가 이 곳의 수려한 경치에 매료되어 이 곳에 은둔해 도관(道觀)을 짓고 도교문화의 철학사상을 전파했으며 “선단(仙壇)”과 “선인족(仙人足)” 등 유적지들을 남겼다.

남송때 군수(郡守) 모규(毛奎)가 부임 후 산수를 즐기다가 이 곳에서 대동천과 소동천을 발견했고 <대소동천기(大小洞天記)> 등 석각을 남겼다. 현재 소동천은 남아 있으나 대동천은 사라지고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다.

대소동천에는 또한 해남에서 최고령을 자랑하는 수령 6300년의 남산 불로송(不老松)도 있고 청(淸)나라 자희태후(慈禧太后)가 친필로 쓴 목숨 수(壽)도 남아 있다.

식생률이 85%이상에 달하는 아름다운 장수의 산 남산(南山)기슭에 위치한 대소동천에서는 고령을 자랑하는 불로송을 감상하고 중의약을 접목시킨 약선(藥膳)을 맛 보는 웰빙장수 투어를 즐길 수 있다.

대소동천이 위치한 남산은 중국 남단의 바닷가에서 가장 높은 명산이다. 2 천 여 년전에 한(漢)나라 때의 한 장군이 남산에 올라 검으로 바위를 갈랐다고 하여 이름한 바위가 시검봉(試劍鋒)으로 남아 있으며 그로부터 등정풍속이 시작되었다.

1247년 애주(崖州) 군수(郡守) 모규가 대소동천을 개발한 후 이 곳은 더욱 등정명소로 내외에 이름이 자자해져 특히 해마다 중양절이 되면 옛날부터 관리와 서민들이 이 곳에 올라 아름다운 경치를 감상하고 많은 글을 남겼다.

대소동천을 개발한 애주 군수 모규가 이곳에서 선인이 된 후 대소동천은 해남도의 도교(道敎)의 발원지가 되었고 그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수행하면서 도교를 전파했다.

748년 당나라 승려 감진대사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 일본으로 가다가 표류 중에 남산 기슭의 대소동천에 올라 절을 짓고 불교를 전파했으며 그 때부터 유교문화가 전해지고 있다.

대소동천의 정상에는 “괴성점두(魁星點頭), 독점오두(獨占鼇頭)”라는 마애석각이 있다. 중국의 전통문화에서 괴성(魁星)은 선비들의 보호신이고 급제한 선비들은 자라가 새겨진 오두벽(鼇頭壁) 앞에서 황제의 어지를 받았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장원급제자는 “독점오두(獨占鼇頭)”, 오두를 독차지했다고 묘사한다. 대소동천의 정상 오두벽 앞에는 중국 최고의 자라가 새겨져 많은 학도들이 이 곳을 찾아온다.

대소동천의 바다에는 높이 1.9m의 남해 용왕(龍王)을 공양하는 남해용왕별원(別院)이 위치해 이 곳에서는 민속관광을 즐길 수도 있다. 갑옷을 입고 보검을 든 용왕은 발밑에 뱀을 딛고 바다를 마주하고 서있으며 해마다 음력으로 2월 2일이면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는 대규모 행사가 펼쳐진다.

바다와 산, 바위와 동굴이 아름다운 대소동천은 송나라 때부터 애주 8경으로 내외에 이름이 자자했고 현재는 많은 사진작가들이 모여와 푸른 숲과 기이한 바위, 아늑한 동굴을 사진에 담으며 대소동천명소에서는 해마다 여러 가지 사진전을 개최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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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대소동천)

키워드:

풍경, 역사인문

위치와 교통:

대소동천(大小洞天, Daxiaodongtiann)은 해남(海南, Hainan)성의 최남단,  삼아(三亞, Sanya)시에서 서쪽으로 40km거리의 바닷가에 위치, 다양한 교통편으로 삼아에 이른 다음 관광버스를 이용한다.

계절:

1년 4계절

설명:

대소동천에서 멀지 않은 곳에 과거의 유배지로 사용되었던 마을 수남촌(水南村)도 빼놓지 말고 볼 명소이다. 당(唐)나라부터 원(元)나라 때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좌천된 관리 20여 명이 이 마을에서 살았다.

조정의 재상과 무신, 문신, 역대의 명인들이 이 마을에 머무는 기간 교육을 발전시키고 예의를 전수해 수남촌은 예로부터 “예악”의 고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수남촌에는 명(明)나라와 청(淸)나라 때 고건물 20 여채가 남아 있다. 오늘까지 완전하게 보존된 이런 고건물들은 규모가 웅장하고 정교하고 특히 조각공법이 아주 뛰어나다.

수남촌에 유배온 관리들이 각지에서 왔기 때문에 이 곳의 건물들은 각자 다양한 풍격을 자랑한다. 다수의 건물들은 문루(門樓)와 가림벽, 마당, 안채, 곁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고건물은 가족 사당건물인 황씨사(黃氏祠)로 두 겹의 마당을 거느리고 있다. 여경당(女警堂)내에 위치한 규수루(閨秀樓)는 당루(堂樓)와 복도가 어우러져 하나를 이룬다.

환한 마당의 주변에 건물들이 둘러서고 건물의 2층에 난간이 있는 복도를 두었다. 이 곳의 명물은 꽃을 조각한 창문 화창(花窓)이다. 꽃을 조각한 사이사이에 꽃가지로 물처럼 흐르는 한자를 새겨 꽃과 나무가지, 나뭇잎, 한자가 조화를 이룬다.

성덕당(盛德堂)은 송나라 때 신축되었고 원래는 당나라 공주의 제15대 손인 배문의(裵聞義)의 사택이었고 현재는 해남 배씨의 사당건물로 사용된다.

송나라 때 이 곳으로 좌천된 호전(胡銓)이 이 저택에 머물었고 호전은 이 마을을 떠나기에 앞서 성덕당이라는 편액을 남겼으며 그로부터 성덕당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 뒤에 몇 백년 동안 많은 관리들이 이 곳에 좌천되어 이 저택에 머물면서 성덕당의 문화적 위상이 점점 높아지게 되었다. 남송때부터 청나라 후반까지 이 곳에 글을 남긴 역대의 관리는 40 여 명이 넘는다.

수남촌에 위치한 대항(大港) 항만은 과거 삼아의 해상 관문이었다. 이 항만의 근처에는 뉘연한 양지바른 언덕이 있는데 경문을 말리는 언덕이라는 의미로 쇄경파(曬經坡)라 부른다.

748년 당나라 감진스님이 많은 불경과 경번, 가사 등을 싣고 일본으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14일 동안의 표류 끝에 대항에서 뭍에 올랐다.

뭍에 오른 감진스님은 마침 날씨가 청명한지라 항만 근처의 뉘연한 언덕을 찾아 물에 젖은 경서와 가사 등을 널어 말렸다. 햇빛 밝은 언덕에 수 천 점의 보물들이 널려 있는 모양이 심히 장관이었고 그로부터 사람들은 이 언덕을 쇄경파라 부르게 되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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