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仙玉
2020-09-23 16:48:13 출처:cri
편집:李仙玉

적감루: 붉은 벽돌의 고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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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적감루)

개관:

대남(臺南)시에 위치한 적감루(赤崁樓)는 1653년 네덜란드 지배 시기에 신축한 유럽식 건물로 프로방시아 성이라고도 하며 한 때 대만 섬의 지배 중심지였다.

청나라 때 기존의 건물이 무너지고 그 뒤에 중국식 사당을 지었다. 오늘날의 적감루는 해신묘(海神廟)와 문창각(文昌閣) 등 건물로 구성된 고적지이며 높은 역사 및 문화적 가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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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멀리서 본 적감루)

역사:

대남은 대만 섬에서 한인(漢人)이 가장 일찍 개발한 곳이다. 1624년 네덜란드 인들이 대남을 점령하고 바닷가의 모래사장에 오늘날 안평고보(安平古堡)가 된 건물을 축조하고 이어 성의 동쪽에 대만의 제일 거리라 불리는 대만가(臺灣街)와 대만 최초의 유럽식 거리인 프로방시아 거리를 조성했다.

1652년 네덜란드 인들은 프로방시아 거리의 북쪽에 프로방시아 성을 축조했는데 붉은 벽돌로 지은 건물이 햇빛아래 불타는 듯 하다고 해서 적감루라 부르기도 했고 붉은 머리칼의 네덜란드 인들이 축조했다고 해서 홍모루(紅毛樓)라고도 불렀다.

1661년 4월 정성공(鄭成功)이 대남을 점령해 대만을 네덜란드 인들의 손에서 되찾고 프로방시아 성에 대만 섬의 최고 행정기관인 승천부(承天府)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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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적감루의 일각)

1664년 승천부가 없어지면서 적감루는 화약 저장 창고로 사용되었다. 1721년 청(淸)을 반대하는 봉기 때 적감루의 쇠를 녹여 무기를 만들면서 건물이 파괴되었고 관리의 부재와 지진 등 요인으로 적감루는 사면의 성벽만 남았다.

19세기 후반에 적감루의 터에 대사전(大士殿)과 해신묘, 봉호서원(蓬壺書院), 문창각, 오자사(五子祠) 등 건물을 지으면서 황폐하던 적감루가 웅장함을 되찾았다.

일본이 대만을 침략한 후 해신묘와 문창각, 오자사를 병원과 학생숙소로 사용했고 1921년 프로방시아 성의 성문을 발견했으며 그 뒤에 네덜란드 포대의 유적을 발굴했다. 1974년 대남시는 적감루를 수선하고 대남시립역사박물관을 설립했으며 1974년에 오늘날의 모양으로 복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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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적감루)

주요명소:

오늘날의 적감루에서는 과거 네덜란드 인들이 축조한 프로방시아 성의 모습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날아갈듯한 지붕에 붉은 기와를 얹은 중국 풍의 두 건물들인 문창각과 해신묘가 적감루의 표지가 되었다.

해신묘와 문창각은 모두 두 겹으로 된 팔작지붕을 하고 있는데 두 지붕 사이에 사실상 2층 공간을 두고 녹색의 유약기와를 부착한 난간을 세워 이채를 돋운다. 문창각 앞 말 석각 뒤의 문은 과거 프로방시아 성의 정문이다.

현재 적감루는 3층으로 되어 있고 건물과 건물은 꼬불꼬불한 통로로 연결되고 날아갈듯한 처마와 난간에는 조각이 즐비하다. 적감루는 넓은 정원을 거느리고 있어 좋은 산책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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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적감루의 비석)

적감루의 정원에는 많은 문화재가 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문화재는 9기의 큰 돌 거북이가 등에 돌 비석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 비석은 청나라 건륭(乾隆)제가 대만수복을 위해 내린 어비(御碑)이다.

그런데 사실 비석의 대좌로 사용 것은 거북이가 아니라 거북이와 비슷한 비시(贔屃)이다. 비시는 용의 아홉 번째 아들로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 좋아한다고 해서 비석의 대좌로 많이 사용된다.

정원에는 그 밖에 다른 곳에서 옮겨온 말 석각과 정성공의 묘비 등 문화재들도 전시되어 있고 정원의 동남쪽에는 정성공 의화도(義和圖)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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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해신묘)

“적감루” 편액이 걸려 있는 건물이 사실 해신묘이다. 3층으로 된 해신묘는 건물 사면에 조각이 즐비한 난간이 조성되어 탁 트여 있다. 문에 들어서자 정성공의 화상이 맞이 해주는 1층에는 적감루와 연관되는 역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고 2층에는 고대의 선박모형과 사해 용왕의 그림이 전시되어 있다.

해신묘의 뒷문은 꽃병모양으로 되어 평안의 의미를 나타내며 문의 상단에는 파초 잎 위에 엎드린 토끼가 조각되어 길함을 대표한다. 해신묘와 문창각 사이에는 반달 모양의 우물이 있는데 이 우물은 네덜란드 인들이 프로방시아 성을 축조할 때부터 있었던 것이라고 전해진다.

그리고 홍모정(紅毛井)이라 부르는 이 우물 하단에 4km 밖의 안평 고보로 통하는 지하도가 조성되어 정성공이 대만을 수복할 때 네덜란드 인들이 이 지하통로를 통해 프로방시아 성을 탈출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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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문창각)

청나라 후반에 문화와 교육의 진흥을 위해 적감루 북쪽에 봉호서원과 문창각, 오자사 등 건물을 축조했다. 문창각의 1층에는 문창제군(文昌帝君)을 공양하는 외 청나라 과거시험제도를 설명하는 장소로 사용하기도 한다.

문창각의 2층에는 괴성성군(魁星星君)이 공양되어 있다. 괴성성군은 중국의 신화에서 글을 주재하는 신이고 과거시험시대의 시험의 신이다. 전한데 의하면 이 신은 아주 신통해서 시험시즌이 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참배한다고 했다.

시험을 관장하는 신이라고 해서 괴성은 우아한 선비의 모양이 아니라 오히려 외모가 추악하고 얼굴이 사납게 생겼다. 귀신의 얼굴을 하고 오른 손에 붉은 붓을 들고 왼 손에 먹을 든 괴성은 오른 발로 자라의 머리를 밟고 왼 발로 별을 건드리며 장원급제의 의미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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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적감루의 성터)

문창각의 뒤에는 프로방시아 성터가 보존되어 있다. 동서남북 네 귀퉁이에 성터가 보존되어 있고 그 위에 군사용도로 사용되는 전망대가 조성되어 있다.

최초에 네덜란드 인들이 축조한 프로방시아 성은 벌써 무너지고 청나라 때 그 터에 복건(福建) 풍의 건물인 주희(朱熹)와 정호(程顥) 등 송나라 때의 이학 학자 다섯 명을 공양하는 오자사를 지었다.

일본 강점 시기 오자사가 바람에 무너지면서 네덜란드 인들이 축조한 성터가 드러나게 되었으며 이 성터는 오늘날 적감루에서 역사적 가치가 가장 큰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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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봉호서원)

문창각의 앞쪽에는 봉호서원의 유적지가 보존되어 있다. 청나라 때인 1886년에 원래 여조묘(呂祖廟)의 인심(引心) 서원을 적감루 북쪽에 옮겨다 다시 짓고 봉호서원이라 개명했다.

최초에 봉호서원은 홀과 강당, 문창각, 오자사 등으로 구성되어 대만에서 규모가 가장 큰 서원이었으나 1906년의 강진으로 인해 많이 무너지고 현재는 복건 남부 풍의 건물인 홀만 남아 있다.

문창각과 해신묘의 서쪽 외벽의 하단에 크고 작은 비석 도합 20여기가 있는데 이런 비석에는 금지령과 다리축조 기록, 사당 보수 기록, 세상에 선행을 알리는 정표(旌表) 등 다양한 내용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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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문창각의 내부)

문창각의 건물 하단에 나 있는 문은 과거 네덜란드 인들이 프로방시아 성을 축조할 때 조성한 건물 정문이다. 정문의 뒤에는 꼬불꼬불한 계단흔적이 남아 있다.

정문의 전방 오른 쪽에는 네 발이 달린 돌로 된 말이 세워져 있는데 이 말이 밤이면 밭에 들어가 농작물을 짓밟고 소란을 피운다고 해서 발이 잘렸다고 전해진다.

정문의 왼쪽에는 양면 비석이 세워져 있다. 정면에는 1893년 중국어 비문을 새겼고 1944년 적감루를 보수하면서 새로운 비석을 세울 자금이 없어서 기존의 비석 뒷면에 일본어로 적감루 보수 내용을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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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적감루)

키워드:

역사, 인문

위치와 교통:

적감루(赤崁樓, Chikanlou)는 대남(臺南, Tainan)시 중서(中西, Zhongxi)구에 위치, 다양한 교통편으로 대남에 도착한 다음 대남역에서 17호선 버스를 이용, 적감루에서 하차한다.

계절:

1년 4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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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안평고보)

설명:

4km 너비의 바다를 사이 두고 적감루와 마주한 안평(安平) 고보는 네덜란드 인들이 극동지역무역을 확대하기 위해 축조한, 대만 최초의 성채이다. 안평고보는 네덜란드 인들의 강점시기와 명나라 정성공의 대만 수복, 청나라의 관리, 일본의 강점 등 시기를 거쳐 300여 년 동안 대만을 지켜보고 있다.

대만에서 가장 오래된 성채인 안평고보는 대만과 같은 운명으로 수차에 걸쳐 건물의 외관과 용도가 바뀌었다. 안평고보는 네덜란드 인들이 대만지배와 대외무역의 허브로 최초로 대만에 축조한 젤란디아 성이다.

정성공이 대만을 수복한 후 네덜란드 인들이 축조한 두 성을 계속 사용하면서 프로방시아 성은 승천부로, 젤란디아 성은 안평진으로 개명하고 승천부는 대만의 정치 중심지로 사용하고 안평진은 관저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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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안평고보)

청나라 때는 화약 저장 창고로 사용되다가 1873년 영국 군함의 포격으로 화약이 폭발하면서 성이 무너지고 성터만 남았다. 일본 강점시기 기존의 성터를 허물로 오늘까지 남아 있는 일본 식 세관 숙소를 짓고 붉은 벽돌로 쌓은 단을 조성하면서 네덜란드 인들이 축조한 젤란디아 성은 완전히 모습을 잃게 되었다.

광복 후 안평고보라 이름을 바꾸고 기존의 일본 식 숙소 건물을 기념관으로 개조했다. 오늘날 젤란디아 성의 웅장함은 볼 수 없지만 풍부한 역사자료와 문화적 의미로 인해 안평고보는 유명한 관광지로 인기가 높다.

붉은 벽돌로 된 계단을 올라가면 정성공의 동상과 안평고보 기념비가 세워져 있고 기념관에는 젤란디아 성의 모형과 명나라, 청나라 문화재가 전시되어 있으며 1975년에 증축한 전망대에 올라서면 저 멀리 푸른 바다가 한 눈에 보여 마음이 탁 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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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적감루의 일각)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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