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仙玉
2019-04-09 11:13:13 출처:cri
편집:李仙玉

關林: 關羽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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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아름다운 관림)

개관: 

관우(關羽)의 무덤 관림(關林)에는 삼국(三國)시기 촉(蜀)나라 장군 관우의 수급이 묻혀 있다. 1596년에 신축된 관림에는 궁궐 풍의 건물이 즐비하고 오래된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묘비가 비범함을 보여준다. 

백원(白園)은 당(唐)나라 때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노후를 보낸 곳이고 사후에 묻힌 무덤이다. 당나라 때의 다른 시인 이백(李白)이 이 곳에 와서 백거이를 만났고 이 만남은 두 시인의 유일한 만남이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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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관림의 일각)

역사:

서기 219년 손권(孫權)이 형주(荊州)를 공격하면서 관우가 생을 마감한다. 220년, 손권은 유비(劉備)의 보복이 두려워 관우의 수급을 낙양(洛陽)의 조조(曹操)에게 보냈다. 

관우의 인품을 높이 산 조조는 관우를 형왕(荊王)으로 추대하고 나무로 관우의 몸을 조각해서 관우의 수급과 함께 낙양에서 남쪽으로 15km 떨어진 곳에 묻고 관묘(關廟)를 지었으니 관림은 오늘날까지 1800 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다. 

명(明)나라 때인 1592년 한(漢)나라 때의 관묘 터에 뜰 네 개에 건물 150여칸을 거느린 웅장한 규모의 관림묘(關林廟)을 증축하고 1605년 관우를 “관성제군(關聖帝君)”이라 칙봉(勅封)했으며 그로부터 관우는 성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청나라 때 순치(順治)제가 관우를 충성과 의리에 넘치는 관성대제 (關聖大帝)라 봉하고 강희(康熙)제가 관우의 무덤을 “관성대제림 (關聖大帝林)”이라 개명하면서 관우의 무덤은 관림이라 불리면서 공자의 무덤 공림(孔林)과 함께 성인의 무덤이 되었다. 

1730년 청나라 황제가 관제묘를 관림이라 개명하는 어명을 내렸고 건륭(乾隆)연간에 관림을 증축해 오늘날의 규모에 이른다. 명나라와 청나라 때 황제와 지방 관리, 백성들은 이 곳에서 관우에게 제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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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관림의 내부)

주요명소:

명나라 때 신축되어 청나라 증축된 관림의 현재 건물은 다수가 명나라 때 고건물이며 완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궁전 형식으로 지은 관림은 엄밀하면서도 웅장한 구도를 자랑하고 중심선상의 건물들이 양쪽에 대칭되게 건물을 거느린다. 

관림의 주요 건물들은 모두 중심선 상에 위치해 있다. 입구에서 뒤로 가면서 무루(舞搂)와 대문(大門), 의문(儀文), 용도(甬道), 배전(拜殿), 대전(大殿), 이전(二殿), 삼전(三殿), 석방(石坊), 팔각정(八角亭)이 한 일자로 위치하고 제일 뒤에 봉분이 있다. 

관림의 건물 중 가장 특색이 있는 건물은 무루이다. 건물의 앞쪽 지붕에는 이중으로 된 팔작지붕을 얹고 뒤에는 이중 맞배지붕을 올려 교묘함을 자랑하며 이런 지붕 구도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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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관림의 문)

청나라 때인 1791년에 지은 관림의 대문에는 아홉 줄에 아홉 개의 노란 돌기를 박아 과거 사회 등급 중 가장 높은 지위를 나타낸다. 문의 양쪽에는 여덟 팔(八)자 모양의 벽을 세우고 “충의(忠義)’와 “인용(仁勇)” 네 글자를 새겨 충성과 의리, 사랑, 용감으로 넘친 관우의 평생을 설명한다. 

명나라 때 지은 의문은 문무백관이 가마와 말에서 내리는 곳이다. 명나라 때 관제묘의 대문이었으나 청나라 때 의문으로 고쳤으며 문의 상단에 걸려 있는 “위양육합(威揚六合)” 액자는 청나라 자희황태후의 어필이다. 

의문에서 전각까지 이어지는 통로 석사어도(石獅御道)는 길이가 35m, 너비 4m이며 바다에 돌을 깔았고 양쪽에 36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104개의 돌 사자를 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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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관림의 통로)

비문의 기록에 의하면 오늘날의 이 통로는 1619년에 증축했으며 황제와 관리들이 관우에게 제사를 지낼 때 경유하는 통로이다. 서로 다른 모양과 자태를 자랑하는 돌 사자의 뒤에는 푸른 소나무가 줄지어 자라며 조화를 이룬다. 

1596년에 지은 대전에는 유리기와를 얹었고 정문에 도원삼결의 (桃園三結義)와 여포(呂布)와 세 번 싸우기 등 이야기를 보여주는 12폭의 목각이 새겨져 있다. 

계성전(啓聖殿)이라고도 하는 평안전(平安殿)은 가장 중심지에 위치하고 가장 웅장한 관림의 본전이다. 대들보와 기둥에 조각이 즐비한 전각에는 금박을 칠한 관우의 조각상이 공양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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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관림의 건물)

1592년의 건물인 이전은 관림의 건물 중 가장 먼저 지은 건물이다. 내부에 관우의 재신상(財神像)이 공양된 이 건물은 재신전(財神殿)이라고도 하며 옆에 관우와 장비(張飛), 조운(趙雲), 마초(馬超), 황충(黃忠)이 공양된 오호전(五虎殿)을 거느린다. 

1817년에 지은 삼전에는 관우가 <춘추(春秋)>를 읽는 조각상과 잠자는 조각상이 있어서 일명 침전(寢殿)이라고도 하며 춘추전(春秋殿)이라고도 부른다. 

과거 황제의 무덤은 릉(陵)이라 하고 왕후장상의 무덤은 총(塚), 백성들의 무덤은 분(坟)이라 했으며 성인의 무덤은 림(林)이라 했다. 관우는 무예의 성인 “무성(武聖)”이라 불렸고 따라서 그의 무덤은 관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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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관림의 관총)

관림의 봉분 관총(關塚)은 관림의 뒤쪽에 위치해 있고 높이는 10m, 부지는 250 제곱미터에 달하며 모양은 팔각형이다. 봉분의 남쪽에 돌로 된 묘실문이 있는 이 곳에는 관우의 수급(首級)이 묻혀 있다고 한다. 

1666년에 지은 팔각정은 모양이 기이하고 정자 안에 거북이 등에 세운 돌 비석 한 기가 있다. 높이 4.8m의 비석 상단에는 용이 새겨져 있고 “칙봉비기(勅封碑記)’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관림의 정문 양쪽을 지켜선 높이 2.7m의 돌 사자 한 쌍은 명나라 때의 작품이며 의문 앞에 있는 쇠로 주조한 1500kg 무게의 사자 두 마리도 명나라 때의 문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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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백원의 일각)

배전(拜殿)의 동쪽에는 명나라 때 주조한 쇠 종이 걸려 있고 종의 양쪽에 관우의 칼이 있으며 가운데는 청나라 때의 건륭(乾隆)과 자희(慈禧) 태후가 어필로 쓴 편액이 걸려 있고 배전 앞의 단에는 역시 명나라 때 주조한 쇠로 된 꽃병 한 쌍이 놓여 있다. 

비파봉(琵琶峰)을 어우르는 백원은 청곡(靑谷)과 봉분, 시랑(詩廊) 세 부분으로 분류된다. 노후에 향산(香山)에 은둔하여 향산거사(香山居士)라 이름한 백거이가 이 곳에 묻힌 것은 그의 명작인 <비파행>의 의미와도 일치해 독창적이다. 

용문교(龍門橋)을 건너 백원의 문을 넘어서면 오솔길 양쪽에 숲이 무성하고 맑은 샘물이 솟아 우아함을 연출한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산 허리에 백거이가 노후에 친구들과 바둑을 두고 차를 마시며 시를 논하던 곳이라고 전해지는 청이정(廳伊亭)이 아담하게 자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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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백원의 비석)

청이정을 지나 계속 올라가면 푸른 소나무들 사이로 우아한 건물이 보인다. 하얀 바위로 된 살아 있는 듯 생생한 백거이의 석상이 공양된 이 건물은 낙천당(樂天堂)이다. 

낙천당에서 더 올라가면 비파봉이 보이고 푸른 소나무들 사이에 벽돌로 둥글게 낮은 담을 쌓은 봉분이 있다. 풀이 가득 자라는 그 곳이 바로 백거이가 묻힌 곳이다. 

봉분구역에는 반달 모양의 묘실과 비석, 오두문(烏頭門), 등도(登道) 등 이 푸른 소나무와 온갖 꽃나무 사이에 산재해 독특한 구도로 숙연함과 우아함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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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백원의 봉분)

푸른 벽돌을 쌓아 조성한 둥근 봉분의 상단에는 19그루의 소나무가 대추나무 한 그루를 둘러싸고 있다. 대추나무 가시는 사회의 폐단을 집어내던 백거이의 성격을 대표하고 대추는 백성을 위한 백거이의 마음을 대변한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와비(臥碑)에는 백거이 명작의 하나인 <취음선생전(醉吟先生傳)>이 새겨져 있고 이는 중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돌의 책, 석서(石書)이다. 

묘실구역의 북쪽에 위치한 시의 회랑 시랑에는 도시서옥(道時書屋)과 취월정(翠樾亭) 등 볼거리가 조성되어 있고 이 곳에는 현대의 중국 서예가와 화가들이 백거이의 작품을 주제로 창작한 서예작품과 그림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백거이 작품의 여러 가지 버전과 그의 일대기가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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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백원의 일각)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면 거대한 비파가 대지 위에 놓여 있는 듯 하다. 백거이의 봉분은 비파의 몸통을 방불케 하고 곧고 길에 뻗은 통로와 주변에 정연하게 줄지은 감탕나무는 비파의 현을 방불케 한다. 

백거이의 인품과 시풍으로 조성된 아름다운 백원에서는 백거이의 일대기를 보고 백거이의 무덤을 배알하며 백거이의 시를 감상하면서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백거이와 마음을 나눌 수 있다. 

아름다운 경치와 우아한 고건물이 조화를 이루는 백원은 1년 중 3 계절이 꽃으로 단장하고 1년 4계절 푸름을 자랑하는 명소이다. 백원의 주변에서는 또 온갖 돌들이 전시된 기석관(奇石館)도 볼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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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백원의 일각)

키워드: 

고건물, 역사인문, 풍경

위치와 교통: 

관림은 하남(河南, Henan)성 낙양(洛陽, Luoyang)시에서 남쪽으로 7km 떨어진 관린남로(關林南路)에 위치, 다양한 교통편으로 낙양에 도착한 다음 낙양역에서 81호선 버스를 이용한다. 

백원은 낙양에서 남쪽으로 12km 거리의 용문동산(龍門東山)에 위치, 낙양시에서 81호선과 53호선, 60호선 버스를 이용한다. 81호선을 이용해 관림을 본 다음 다시 버스에 올라 종착역에 이르면 백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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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관우의 화상)

계절: 

1년 4계절

설명: 

출생일자는 미상이고 220년에 생을 마감한 관우는 산서(山西)출신이고 일찍 유비(劉備)를 따라 동분서주했고 유비, 장비와 함께 도원삼결의를 맺었으며 조조에게서도 높은 대우를 받았으나 여전히 유비에 대한 충성으로 조조를 떠나 유비의 곁으로 돌아갔다. 

그 뒤에 관우는 유비를 도와 세력을 확대했고 자신은 형주를 지켰으나 손권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생을 마감한다. 사후 관우는 신화(神化)되면서 관공(關公)으로 불렸고 역대 조정으로부터 충성과 의리, 용맹의 신, 무예의 성인, 무인의 성인으로 불리며 공자(孔子)와 나란히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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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백거이의 화상)

772년-846년의 백거이는 자가 낙천(樂天), 호가 향산거사(香山居士)이며 혹은 취음선생(醉吟先生)이라고도 부르는 당(唐)나라 때의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이고 이백(李白), 두보(杜甫)와 함께 당나라 3대 시인으로 인정된다. 

산서출신인 백거이는 관직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고 다양한 주제와 형식으로 시를 쓰고 알아듣기 쉬운 통속적인 언어를 사용해 “시마(詩魔)”와 “시왕(詩王)”이라 불리기도 한다. 

현재 백거이의 시 묶음인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이 전해지고 그의 대표 시작으로는 당현종(唐玄宗)과 양귀비(楊貴妃)의 러브 스토리를 묘사한 <장한가(長恨歌)>, 목탄을 만드는 노옹의 어려운 생활을 묘사한 <매탄옹(賣炭翁)>, 비파를 뜯는 여인의 비참한 생활을 묘사한 <비파행(琵琶行)> 등이 있다. 

번역/편집: 이선옥 korean@cri.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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